phototherapist 2011. 2. 17. 18:32

                                                덕수궁은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문 앞에는 외국인들이 일찍부터(나보다 훨씬 부지런한)나와 기념 촬영을 한다.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11시, 2시, 3시30분에 한다는데 저들은 저렇게 계속 서 있으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나?

            오랜만에  비로 청소한 마당을 본다.

                   옆 문으로 보는 함녕전.

               궁궐이나 한옥을 보면 유독 아름다운 문양을 자랑하는 문과 문고리.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나?

               러시아의 건축가를 불러 지었다는 연회와 휴식을 위한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라는  정관헌.

                고종이 커피를 즐기던 정관헌에서 바라 본 소나무. 나도 잠시 그의 시선으로 밖을 바라다 본다.

                   꽃담 사이로 난 문들이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느낌.

              무지개 모양의 유현문이 잘 보이지 않네.ㅉㅉ

  아마도 석어당의 소나무와 문살인 듯, 내가 찍고도 이런 이런.

 

 

 

 

등나무가 타고 올라간 벤취가 놓여있는 이곳은

봄에 다시 한번 와서 앉아 보고 싶다는 ..